들어가며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에 건설되어 역사의 풍상을 견딘채, 화려하고도 웅장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화성은 우리민족문화의 위대한 금자탑 중의 하나이다. 서울에 버금가는 대도시를 지향하며 건설된 계획적 신도시 수원과, 그 자족적 발전을 뒷받침하고자 설치된 많은 부속시설들, 거창한 규모의 화성행궁, 그리고 이들을 옹위하는 전장 5.7㎞에 달하는 화성성곽의 건설은 조선역사상 서울 건설이후 가장 대규모사업이었다. 총괄하여“화성성역(華城城役)”이라 불렀던 이 엄청난 사업은 정조18년(1794) 정월에 시작,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어 정조 20년(1796) 9월에 완공하고 10월 16일 낙성연(落成宴)을 갖기까지 단지 34개월의 시간만이 소요되었다. 여기에는 정조임금의 남다른 열정, 신하들의 탁원한 지혜와 노력이 기울여졌으며, 수많은 백성들의 기술과 힘이 효과적으로 결집되는 등, 당시 중흥을 맞았던 정조시대 조선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 되었다.
1. 화성읍치의 이전
1789년 7월, 서울 남쪽의 경기도 땅에는 가재도구를 짊어지고 어린아이들을 등에 업은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 오랫동안 살아오던 옛 수원읍을 떠나 새로 읍이 만들어지는 팔달산을 향해 길을 나선 사람들이었다. 얼마전 느닷없이 나라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 사는 수원은 앞으로 사도세자의 무덤이 들어설 것이니 주민들은 자재도구를 챙겨 새 고을로 정한 팔달산 아래를 가서 각자 새집을 마련하라는 명이었다.
주민들은 놀랍기도 하고 두려운 마음이기도 하였겠지만 한편으론 희망과 기대도 있었다. 새 고을은 지금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바야흐로 새 수원의 시대가 열리기시작한 것이다. 1789년(정조13년) 7월 11일, 어전회의에서는 사도세자무덤을 수원읍의 주산인 화산아래로 옮기는 일을 결정하고, 이어서 수원읍을 다른 곳으로 이전할 것도 정하였다. 새로 이전되는 수원읍의 위치는 팔달산 아래로 정하기로 하고 새로 조성되는 수원의 읍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전에 광주군에 속해있던 일용, 송동 두면을 수원부에 흡수시키도록 명하였다. 화성이 완성되고 나자 신도시 수원의 도시골격이 정돈되기 시작하였다. 행정적으로 성곽 안팎 주민들의 거주구역은 2개부로 나뉘어지고 다시 그 안에서 4개의 거주지로 편성되었다.
성안을 (팔달문, 장안문)으로 관통하는 남북대로와 관아정문(화성행궁)에서 동문(광주, 남한산성방면)으로 나가는 동서도로가 중심도로가 되고 두 도로가 교차하는 중앙에 십자가라고 부르는 교차로(종로)가 생겼다. 남북대로의 서편, 즉 팔달산이 있는 산 아래쪽은 관아와 객사 등이 차지하였다. 십자 가 주변은 큰 가게들인 전방이 들어섰다. 나머지 북문과 남문주변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민가들이 자리했는데, 특히 남문주면에 큰 집이 많이 들어서고 상대적으로 북문주변은 소규모 주택들이 자리 잡았다. 개천주변은 아주 영세한 주민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서울은 조선 초부터 5부제가 도입되어 동, 서, 남, 북 4개부와 중부로 조직되어 있었다. 수원부도 당초의 남리, 북리를 버리고 서울과 같이 남부, 북부로 개칭하였다. 구분하는 단위는 자내(字內)자를 써서 남성자내, 서성자내, 북성자내, 동성자내로 하였다. 자내로 불리우는 네개 지역의 위치는 기본적으로 십자가를 기점으로 해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나뉘어져 있다.
2. 수원화성 축성 완벽한 신도시 계획 작품
화성건설은 영국의「어배니저·하워드」(Ebenezer Howard)에 의한 전원도시(田園都市) 구상(1898)보다 102년이나 앞서고 구상이 실천된 것보다는 150여년이 앞서는 것이라고 할수있다. 더구나 화성은 신도시(新都市), 혹은 전원도시(田園都市) 개념과 맞아 떨어지는데, 이는 첫째, 수도인 한양을 모도시(母都市)로 해서 계획적으로 조성한 위성도시(衛星都市)였고, 둘째는 신도시의 번성을 위해 수도의 기능일부를 이전했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자족적(自足的)인 도시로 키우려 했다는 점 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20세기 후반들어서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치는 신도시 열풍과 견주어 볼때 서구의 구상보다 100여년 앞서 훌륭하게 건설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만족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주는 화성축성의 계획적 특성들과 과정들을 살펴보는데 의의를 가지고 있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신도시인 화성은 조선22대 임금 정조(재위기간 : 1776~1800)가 생전에 이룩해 놓은 최대의 위업이었다.

여기에는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생각과 지혜들이 투입되었고 최고기술을 몸에 익힌 장인들의 땀과 노력이 부어졌다. 특히 축성계획과정에서 한 두 사람의 독선으로 일을 정하지 않고 될 수록 많은 사람의 의견이 모아지고 논의되었으며, 일단 조성된 도시를 불완전한 면을 보완하고 제반공사 여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려 5년 동안의 계획과 준비 기간을 거쳐 화성을 쌓게 되는 정조의 성숙한 지도력이 화성신도시가 성공적으로 조성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화성은 처음부터 설계되고 시공된 계획된 신도시
당시 실학과 젊은 학자 양성연구의 중심으로서 규장각의 대표적이 신진학자였던 다산 정약용(당시 31세)에게 새로운 개념의 도시에 걸맞는 성곽을 구성해 볼 것을 지시하였다. 다산이 구상한 기본계획안(Master Plan)인“성설”은 수정되지 않고 정조에 의해“어제성화주략”이라는 이름으로 결정, 시행되었다.
화성의 위상확립이 병행
정조 17년(1793년) 2월 화성은 제2의 행정도시인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정조21년(1797년) 1월 화성에 온 왕은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화성 번영책으로 한성부·개성·평양·동래 등의 거상들로부터 이주 신청을 받아, 응모자 가운데 20인을 골라“계”를 조성케 하고 인삼의 국내매매 및 대중국 무역에 따라 독점권을 주도록 하였다. 또 금융특혜 대여금 10만 냥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국가적인 명령체계와 화성축성 원칙을 제시
국왕, 재상에서 말단관리에 이르기까지 지혜와 국력이 총동원되었다. 공사착수 3개월전 정조17년(1795년) 12월 6일 왕은 채제공, 조심태를 창덕궁 성정각에 불러놓고 화성의 성곽형태 및 시공방안에 대해 기본방침을 제시하였다. 이때 체재공이 제시한 축성원칙으로는 ①빨리 서두르지 말 것 ②화려하게 하지 말 것 ③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등을 제시하여 적용토록 하였다.
실학정신을 반영
서양의 과학기술 및 새로운 정보 도입, 청나라가 편집한 백과 전서인 고금도서집성 10,000여권 중 5,020권을 정조원년(1777)에 구입하여 기기도설과 같은 서양의 과학 기술서적 등을 활용 하여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독자적인 건설도구와 기기의 개발, 거중지(1부), 녹로(2좌), 유형거(11량), 대거(8량), 평거(76량), 발차(2량), 동차(192량), 구판(8좌), 설마(9좌)등을 이용하였으며, 거중기·유형거·녹노 등을 만들어 기계의 사용으로 인한 공기단축, 새로운 기계장치에 대한 실험적인 접근자세와 창조정신 그리고 수고를 덜수있도록 노력한 애민정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성제의 집대성 및 실용적인 축성, 임진왜란의 경험과 김종서, 유성룡, 유형원의 기록을 고려하고 중국성제(전돌, 공심돈, 노대) 및 일본성제의 장점을 분석하여 채택하였다. 그리고 활 과 칼의 시대에서 총과 대포의 시대로 바뀌는 시대적 흐름을 수용하였다. 벽돌 등 신소재의 사용으로 자재의 규격화와 대량생산, 서설물 형태와 보수상의 효율성등 견고하고 아름다운 화성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였다. 자연지세를 이용한 축성원칙과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연과 동화되는 건축을 지향하였다.
공사방식의 합리성과 새로운 방식을 추구
관청이 공사를 주관하여 직접시공을 집행해나간 직영공사였으며, 축성공사를 위하여 “화성성역소”라는 공사본부를 설치하여 운용하였다. 수원 옛 고을(구읍치)의 이전 대상가옥 319가구에 대하여 신분, 집터, 집 규모에 대한 실시결과를 참작하여, 주택보상비와 이전 비용까지 지급되었다. 종래 부역에 의해 노동력을 무임으로 공출하거나 직종에 관계없이 한 달을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노임을 주던 방식을 버리고, 직종과 작업일수를 기 준으로 성과급제를 적용한 합리적인 노임제도를 정착시켰다. 이것은 장인들의 작업능률을 크게 향상 시키는 것이어서 시공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관급과 민간매입에 의한 전국의 자원조달과 축성에 종사한 전문가의 효율적인 이용을 도모하였다. 공사감리와 시공에 책임을 분명히 하는 토목실명제를 적용하였다. 공사에 차명한 서민들까지의 이름도 기록함으로서 당시 공역자들의 수평적 구조를 읽어 낼 수 있다.
3. 자족도시를 지향
수원의 동서남북에 현대화 된 수리시설(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만안제)을 갖춘 인공저수지를 만들고, 그 주변에 시범적인 국영농장을 건설하여 선구적인 농업진흥책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수원이 농업연구의 중심도시(농촌진흥청,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등)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종로를 중심으로 한 팔부자 거리 등 상공업을 유치하여 자족성을 확보하고, 세제혜택과 인삼 등의 무역독점권 등을 부여함으로서 화성의 유통 중심성을 강화시켰다. 일곱째, 화성은 기록문화의 성취를 드높였다.
봉수당에서 베푼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이하여 만든 8일간의 수원행차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에는 정조의 능행, 낙성연, 과거보기, 회갑잔치, 경 로잔치 등을 표현하는 그림과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 먹었던 다양한 음식 종류와 그릇 수, 사용된 재료의 종류와 양, 비용 등이 담겨 있어서 당 대의 생활모습과 탁월한 문화적 수준을 대변하고 있다. 화성은 축성과정과 성과를 담은 기록물이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일종의 화성성역공사 보고서로서 축성과정, 그리고 사용된 비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8세기말 당시 이러한 치밀한 공사보고서를 남긴 것은 세계로 유래를 찾기 어렵다.
마치며
화성은 뛰어난 건축미학, 도시공간미학을 이루어서 당시 진경문화의 보고가 되고 있다. 화성조성에는 국왕의 적극적인 의지와 당대 제일의 예술, 문화인, 학자, 관료들의 경험 등이 동원된 모든 기술문화적인 성과가 총합적으로 반영되었다. 치수를 위한 토목기술과 방어를 위한 축성기술이 만나서 도시경관의 창조와 도시공간 활용으로 실용적 사고와 미학적 사고가 조화된 진경문화의 계 획비법이 적용되었다.
화성은 상대적으로 평지에 세워진 도시라 성곽은 명확한 특성을 가지는 도시 공간요소로 작용하고 있고, 서장대, 공심돈, 팔달 문, 방화수류정, 장안문, 화홍문, 봉화대등 성의 형태부터 각 시설물의 건축에 이르기까지 미적감각이 동원되었고, 자연의 현상을 거스르지 않는 범 위에서 인공적인 조형물을 빚어낸 건축물에서 실학이 진경문화를 뒷받침하는 건축 미학적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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