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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공부] 임진왜란의 중요 전투지 오산 독산성 세마대 권율장군 이야기, 봉담 삼천병마골 이야기

by Sugarone 202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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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독산성(山)은 오산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독산 정상부(해발 208m)와 7~8부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한 테뫼식 형태의 석축산성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초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까지 걸쳐 군사, 교통 지리적으로 중요 요충지의 하나이다. 임진왜란때 주요 격전지로 권율장군과 관련하여 세마산(山), 세마대(萬事)라고 불리운다. 수원에서 1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진행하여 태안읍 남쪽의 양산교를 지나 약 1km쯤 가면 세교리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약 3km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우뚝 솟은 독산(석대산, 세마산, 혹은 향로봉이라고도 한다)과 만나게 된다. 오늘은 임진왜란의 주요 격전지 중 하나인 독산성 세마대에 대해서 살펴볼게요.

 

독산성 성곽의 지리적 중요성

 독산성의 규모는 복원성벽의 중앙부를 기준으로 할 때 1,095m에 이른다. 북쪽은 봉우리 바로 아래의 9부 능선부를 성벽을 축조하였으며, 남쪽은 봉우리 아래 6~7부 능선부를 크게 돌아 성벽으로 연결하여 전체 지세는 북고남저형을 이룬다. 성벽의 바깥쪽은 석재를 이용하여 정연하게 쌓았으며, 안쪽은 막돌과 흙으로 채워 넣고 내벽을 축조하지 않아 편축식이다. 성돌은 자연석을 조금씩 다듬었으나 정연하지는 않고, 크기도 사람 머리만한 크기에서부터 가로 길이가 약 2m에 이르는 바위까지 다양한 편이다. 성벽의 현재 높이는 대부분 2m 정도이지만 동쪽 수구 부근과 남동쪽 치에서는 5~9m에 이르는 곳도 있다.

독산성 모습
독산성 모습


성벽 위에는 여장시설이 설치되었는데 보수시 전돌이 수습되었다. 출입시설로는 동서남북의 성문 4곳과 암문 1곳을 두었는데 남문과 서문에는 문루(門)가 있었으나 동문과 북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배수를 위한 수문은 3곳이 있었으며, 우물은 6~7기 있었으나 수량이 풍부하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치는 북문과 동북문 사이에 2개, 서문과 남문 사이에 1개, 남문과 동문 사이에 2개 등 모두 7개소가 있다. 독산성의 평면배치는 입면으로 볼 때 3단으로 공간이 분할된다. 제 1단은 성벽이 연결된 체성부이며, 제 2단은 산사면에 관청과 민가건물이 입지하였던 거주공간에 해당된다. 최상단부인 제 3단은 세마대지가 자리한 정상부이다. 

남아있는 독산선 성곽
남아있는 독산선 성곽
남아있는 성곽 문
남아있는 성곽 문

조선시대 독산성의 중요한 의미

 

독산성은 수원부의 읍치였던 융릉에서부터 독산성으로 이어진 넓은 들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산성 서쪽으로는 황구지천이 남류하고 있다. 수원과 오산간을 에워싼 주변 평야에 우뚝 솟아 주변 지역을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은 만기요람의 이정구 독성산성기(李)에 잘소개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성이 넓은 들판 가운데 있어서 험준하게 막힌 곳이 없고 산이 우뚝하게 길 옆에 솟았는데, 숲이 없어서 바라보기에 밋밋하다고 독성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이 성이 중요한 자리에 있어 나라안의 요충이 된다는 것을알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군사전략적으로 독산성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인물로는 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풍천유향에서 독산성의 방어전략에 관하여 상론하였는데 내용을 보면 “내가 수원에 있는 독성산성의 지형을 살펴보니, 마늘모양의 봉우리 하나가 큰 들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데 삼면은 절벽이고 길이 트인 남문쪽이 다소 평탄한 듯하다. 그러나 이곳 또한 말을 달리면서 육박전을 벌일수 있는 지역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왜구들이 서울에 가득히 주둔하고 있을때 도원수 권율은 호남의 근왕병을 이끌고 이 성에 와서 주둔하였는데, 수만명의 왜적들이 종일토록 이곳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조총 한방도 쏘아보지 못하고 물러갔다. 성을 올려다보면서 공격하기가 어려움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이 성은 경기지방의 큰 진영이 되었는데 이곳의 지형과 도로가 삼남지방을 연결하고 도성의 번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이 성을 서울의 군영과 동일하게 중요시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권율장군과 세마대 삼천병마골 얽힌 이야기

임진왜란 1592년 12월, 권율 장군은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 수복을 위해 북진 길에 올라 독산성에 포진하게 되었다. 그가 곧바로 한양으로 향하지 않은 이유는 이전의 경기도 용인 전투에서 주장(生) 이광(李)의 판단착오로 왜군에게 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한양의 왜군은 커다란 위협을 느꼈다. 금산의 이치령 전투 이후 권율 장군의 용맹은 왜군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가 수원지역을 점령하면 자신들의 보급로가 끊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쪽에서 한양에 이르는 길은 부산~대구~수원을 거쳐 오는 길과 바다를 통해 인천의 제물포로 들어오는 항로가 있었으나 해상권을 이순신 장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해상 쪽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세마대
세마대


 왜군은 숙의를 거듭한 끝에 권율장군을 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子高 家)는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풀어 삼진(三으로 하여 수원을 향해 출정시켰다. 왜의 대군은 독산성 주위에 진을 치고 기습공격과 유인책을 번갈아 썼으나 성내의 아군은 방어 위주로 일관하며 성을 굳게 지킬 뿐이었다. 비록 병력이나 화력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독산성은 지세가 험하여 쉽게 공략당할 대상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권율 장군의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왜군의 공격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왜군은 지구전을 펼치기로 했다. 즉, 성의 물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독산성은 대부분 바위로만 되어 있는 데다 많은 병사로 인해 필시 물이 부족하리라 생각한 왜군은 공격을 중단한 체 아래쪽을 포위해 버렸다. 

 

왜군의 예측은 적중하여 아군은 금세 식수부족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권율 장군은 이러한 상황에 접하고도 당황하지 않고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먼저 말과 쌀을 준비해 적군들에게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올려다 놓게 했다. 그러고는 말들을 붙들어맨 후 말 잔등에 연이어 쌀을 끼얹게 했다. 이때서야 부하 장수들은 권율 장군의 계책을 깨닫게 되었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열심히 말잔등 위에 쌀을 끼얹고는 솔가지로 잔등을 쓸어주게까지 했다.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왜군들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산 봉우리에 포진해 있는 병사들이 식수부족은 고사하고 물로 말까지 목욕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솔가지로 잔등까지 쓸어주는 그들의 여유만만한 모습은 이제나 저제나 공격할 때만 노리고 있던 왜군들을 허탈감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왜장은 퇴각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힘을 다해 공격해도 일사불란하고 완강한 저항에 막혀 공격은 번번이 실패할 뿐만 아니라 아래쪽을 포위하고 있어봐야 식수가 떨어질 날은 요원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양에 주둔하고있던 왜군들이어서 오래 지체하고 있다가는 도성의 방위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왜군들이 성의 목책들을 불태운 뒤 한양 방면으로 퇴각하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권율 장군은 정예기병 1천여명을 풀어서 퇴로를 기습 공격하여 수많은 왜군을 척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오늘날의 화성군 봉담면 일대에 복병을 매복해 두었다가 퇴각하는 왜군 3천여명을 몰살시키기도 했는데, 이 장소는 이후로 삼천병마골(三)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독산성 전투에서 다시 한번 혁혁한 승리를 거둔 권율 장군은 이후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하하는 이여송의 명군과 합세하여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긴 후 행주대첩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전공을 세운게 되었다. 이후 독산성 정상부인 이곳을 말을 씻긴 곳이라 하여 세마대(萬事)라고 하였다고 한다. 현재 정상부에는 '세마대'라는 정자가 건립되어 있다.

 

마치며

권율 장군의 기발한 심리전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물이 부족하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사라졌다고 판단한 왜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했습니다. 이로써 권율 장군은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적의 대군을 물리치고, 독산성을 지켜낼 수 있었는데  이 일화는 권율 장군의 용맹뿐만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뛰어난 지략과 재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독산성에는 당시 권율 장군이 이용했다는 세마대(洗馬臺)가 남아 있어, 그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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