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부

[공부] 동학농민운동 인내천사상, 녹두장군 별명의 유래

by Sugarone 2025. 11. 8.
728x90

들어가며

동학혁명은 19C 후반기 농민들의 반침략 반봉건 투쟁에서 그 규모에 있어서나 격렬성에 있어 아시아 반제민족해방 투쟁의 새벽종을 울린 하나의 역사적 사변이었다. 이 동학혁명의 조직 지도자가 바로 전봉준이다. 그러므로 전봉준의 농민군 지도자로의 등장과정과 전쟁에서 그의 역할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은 동학혁명 전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1890년대 초 농민들의 반침략 반봉건 투쟁은 삼례와 보은 집회투쟁을 계기로 더욱 급격히 성장하였다. 1893년 3월 10일부터 시작된 보은집회에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동학도인들을 비롯하여 상인, 하급관리 등 수만명이 참가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일대기

전봉준이 농민군 지도자로 등장한 것은 다음으로 그의 남다른 기질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1854년 전라도 고창현 덕정면 당촌에서 서당 훈장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 나가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13살 때에는 <백구시>라는 한시를 지어 마을사람들을 크게 경탄시켰다. 그는 나이가 든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을 서당훈장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가르쳤으며 <시서백가>의 설을 안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의가 밝고 인망이 또한 높았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평시에 마을 사람들과 별로 상종하지는 않았지만 동리에 경사나 상사가 나면 의례히 찾아가 축하와 조의를 표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사람들은 그를 보통인물이 아님을 알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1888년에 동학접주 손화중을 만나 동학에 입도하게 된다. 그의 동학입도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사상을 동경하고 부패한 봉건제도를 '개혁'하여 보려는 입장에서 출발한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자주 만나고 친교를 두터이 한 인물들은 대체로 호남의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김개남, 호서의 서장옥, 황하일과 같은 동학의 유력한 접주들이었다. 그는 또한 의술과 복술, 풍수도 보며 마을사람들을 규합하고 짬짬이 역대의 군사관계 서적들을 탐독하였다. 이 무렵 고부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만행을 저지시키기 위한 농민들의 항소투쟁이 두 차례나 벌어졌다. 조병갑은 마을농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항소투쟁에 나선 농민대표들을 난민으로 몰아대고 그 투쟁에 앞장섰던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잡아가두고 학살하였다. 이것은 전봉준에게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었다.

 

1893년 11월 이미 친교가 깊은 동학의 접주 손화중, 최경선을 비롯하여 20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리며 농민들을 봉기에로 이끌었다. 전봉준은 1894년 2월 15일 백산에서 농민군 지휘부로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였고 여기서 '창의대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날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동학혁명의 개시를 선포하였다. 아울러 격문을 발표하고 행동강령도 발표하였다. 그의 지도력을 처음으로 과시한 것이다. 여기에는 척양척왜로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을 것에 대한 투쟁목표와 단계별 과업, 활동규범 등이 명확히 밝혀져 있다. 격문과 행동강령에는 유교식 '士'의식에서 충군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로부터 봉건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높은 투쟁목표를 제기하지는 못하였다.

 

대신에 농민들을 비롯한 각계각층 농민들의 절실한 요구와 염원, 애국애족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었다. 전봉준의 지도력은 농민군을 조직하고 그 대오를 확대 강화하는데 동학조직을 이용하였다. 지난 시기 '동학란'으로 '동학군'으로 불리워 온 것도 이와 관련된다. 농민군의 조직적 공간을 동학의 동접주들과 중하층 선각자들로 꾸렸다. 동학혁명의 개시와 함께 조직된 호남창의대장소의 지휘성원들은 원래 동학의 접주 또는 중하층 선각자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동학도였던 손화중, 김개남 총관령, 김덕명 총참모는 오래 전부터 전봉준 총대장과 교제가 깊은 인물들이었다. 전봉준은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 대오를 부단히 확대 강화하는데 동학포 조직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것은 동학의 포․접들이 동학도인들을 통일적으로 움직이고 교화하는 동학의 교단조직이었으며, 동학에서는 이것을 통하여 일반군중 속에서 동학사상을 전파하고 동학도인들을 통일적으로 조직 동원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종일관 동학하층조직인 포를 이용하였다. 전봉준은 이렇게 전쟁의 매 단계에서 일정한 전략전술을 세우고 농민군의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동학혁명에 농민군 지휘자로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으나 봉건군주에 대한 유교적인 '사(士)'의식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근본화근이 국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봉건제도 자체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전주화의 이후에도 전라도 전 지역의 농민군의 자치기관으로서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 을 실시하면서도 악질적인 관리들을 처단하는데 그치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전봉준의 지도력의 제한성으로 각지의 농민군의 투쟁을 통일적으로 결속하지 못한 것이다. 동학혁명은 그 성격으로 보아 전국적 규모에서 벌어진 거족적인 반침략 반봉건 투쟁이었다.

 

일부 연구자들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8개 도의 85개 지역을 휩쓸었으며 투쟁에 참가한 농민군 수는 적어도 3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농민군들을 통일적으로 묶어세우고 군세를 강화하지 못했다. 전봉준은 전라도 농민군 지휘자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농민군은 전국적 범위에서 큰 규모로 일어났지만 조직적인 연계없이 고립적으로 투쟁하게 되었다.

 

전봉준 장군의 피체와 녹두장군 별명의 유래

전봉준 장군은 1894년 11월 9일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2만여 농민군과 반외세와 반봉건을 외치며 싸웠지만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군과 일본군이 합세한 전투에 맞섰지만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전봉준 장군은 살아남은 농민군 3천여 명을 후퇴시키고 11월 말에 원평과 태인에서 다시 관군과 맞서 싸웠지만 대패하고 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전봉준을 체포하거나 숨어 있는 곳을 신고한 자는 크게 포상한다는 벽보를 붙여 사로잡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입암산성을 거쳐 백양사에서 잠시 숨어 지내다가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피신하였습니다.

전봉준 장군 피체 호송
전봉준 장군 피체 호송


이곳은 전봉준 장군의 옛 부하였던 김경천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경천은 현상금에 눈이 멀어 전봉준 장군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관군에 밀고하여 결국 이곳에서 잡히고 말았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순창 관아에 갇혔고 이튿날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로 이송되었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체포 당시 심하게 두들겨 맞아서 부상이 매우 컸습니다. 나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된 전봉준 장군은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재판을 받았습니다.

 

3월 29일에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최후 진술에서 “일본 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하고 간사한 관리를 축출하여 임금 곁에서 깨끗한 사람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하게 하고 나는 고향에 내려가 농사에 종사할 계획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양반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해 백성들의 불만이 매우 컸습니다. 이때 고부에서 조병갑이라는 군수 횡포가 너무 심했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앞장서서 이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전혀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농민들과 합세하여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등을 내세우며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나라의 세금을 내는 사람은 대부분이 농민이었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의 의견이 중앙에 직접 반영되는 새로운 정치 개혁을 꿈꿨던 전봉준 장군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전봉준 장군은 1855년 고창 당촌 마을에서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을 이장을 맡기도 하고 서당 훈장을 하여 전봉준 장군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키가 작아서‘녹두’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습니다.

 

인내천사상

동학에서는 당시 사람에 대한 견해에서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을 자기의 독특한 체계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철학적 세계관 형성발전에서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하느님', '하늘신'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즉 자연 밖에 있는 초자연적인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이나 '하늘신'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신령'이란 곧 '하느님'이며 따라서 이것은 누구나 '하느님'을 자체에 모시고 있으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동학은 '상제'나 '하느님' 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사람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천상에 있다고 하는 '상제'를 부정하고 그러한 설을 허무한 것으로 낙인한 것이다.

인내천 사상
인내천 사상


동학의 한울님은 사람이나 세계 밖에 존재하면서 세계의 창조나, 지배자로 되는 목적과 의지를 가진 신적 존재가 아니며, 인간에 의하여 소외된 종교적 외피를 입힌 신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동학은 비단 사람만이 '하느님'을 지닌 것으로 본 것이 아니다. 우주자연의 천지만물이 다 하느님을 모셨다고 하였다. 귀신도 다 사람 자신이 만들고 스스로 숭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도교의 '옥황상제'나 유교의 '상제', 천주교의 '하느님'도 역시 다 사람이 마음에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을 떠나서 사람 위에 군림하는 그러한 신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해월은 귀신을 천지, 음양, 동성이며 그 근본을 따지면 하나의 기(지기)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상제'나 '하느님' '귀신'들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 몸에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에 기초하여 '사사천(事事天, 모든 사물이 다 하늘이라는 뜻)', '물물천(物物天, 모든 물건이 다 하늘이라는 뜻)', '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뜻)'에 관한 견해를 제기하였다. 종래의 철학에서 인간 밖의 천상에 존재하면서 우주만물의 창조자로, 지배자로 군림하였던 '상제'나 '하느님'을 땅위로, 사람의 마음으로 끌어내리고, 하느님이 창조하고 그 지배를 받는다던 인간을 우주만물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고 영특한 존재로 끌어올린 것은 필연적으로 하느님과 사람을 동등한 위치에서 고찰하는 인내천사상을 도출하게 된다.

 

인내천사상은 바로 사람과 하느님과의 상호관계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명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또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에 기초하고 있다. 동학은 세계에 대한 지기일원론적 고찰방법으로부터 '인내천'이라는 특유한 철학사상을 내놓게 되었다. 사람은 다같이 '지기'의 산물이라는 지기일원론에 의하면 사람 상호간의 관계문제에서 다 같은 '지기'의 산물로 평등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의 원리에 이르게 된다. 사람을 하늘같이 받들고 평등하게 대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동학은 바로 이러한 원리로부터 당시의 부패한 봉건사회는 막을 내리고 반드시 새로운 '이상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개벽'에 관한 사상을 제기함으로써 농민으로 하여금 봉건통치를 반대하고 투쟁하도록 고무 추동하게 된다.

 

마무리

동학사상이 동학혁명의 사상적 원천의 하나로 된 주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동학은 사람과 하느님과의 상호관계문제를 철학의 기본문제로 제기하고 ' 인내천'에 관한 사상을 제기함으로써 유교나 천주교를 비롯한 선행 종교철학들에서 천상의 세계로 끌어올려 우상화하고 숭배하던 하느님을 땅위로 끌어내리고 사람의 지위를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끌어올리는 등 철학계에서의 새로운 신화를 이룩하였다.

728x90

댓글


TOP

Designed by 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