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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공부] 동학농민운동 봉기 배경, 동학농민군이 일어나서 싸운 이유, 황토현 전투 이야기

by Sugarone 2025.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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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동학농민운동은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조선 후기 이래 군․현 단위로 전개되어 온 반봉건 농민항쟁의 흐름을 전국적인 규모에서 종합하여 봉건 모순의 척결을 촉구하는 한편, 개항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야기된 민족 모순을 극복하여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반제․반봉건 운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대체로 네 단계로 발전되어 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늘은 동학농민운동의 단계별 활동, 시발점인 고부민란의 배경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동학농민운동 봉기 배경
동학농민운동 봉기 배경

동학농민운동의 단계

제1단계는 ‘고부민란’의 단계이다. 고부에서 민란이 발발하여 농민 약 1천여 명이 고부관아를 습격한 1894년 1월 11일(양력 2월 17일)경부터 3월 3일(양력 4월 8일) 신임군수 朴源明의 설득으로 해산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제2단계는 ‘제1차 농민전쟁’의 단계이다. 3월 20일(양력 4월 25일) 무장에서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이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기포한 때부터 5월 7일(양력 6월 10일) 전주화약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제3단계는 ‘執綱所 시기’이다. 청군과 일본군의 침략으로 농민군이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한 5월 8일(양력 6월 11일)부터 9월 12일(양력 10월 10일)까지 농민군은 전라도 각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 통치를 실시하였다.

 

제4단계는 ‘제2차 농민운동’의 단계이다. 농민군이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재봉기한 9월 13일부터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패배한 1894년 말까지의 시기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

동학농민전쟁의 발단은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고부민란은 조선 후기의 여느 민란과 비슷한 원인과 과정으로 전개되었으나, 그 지도자와 민중이 민란의 경험을 통해 과거에 비해 한 차원 높은 농민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데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부민란은 전라도 전역의 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말기의 농촌은 수령의 수탈체제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고부민란은 조선후기 다른 고을의 민란과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객관적 조건에서 시작되었다.

 

정치기강의 문란과 매관매직의 성행, 관리들의 극심한 부패에 농민들의 불만은 높아만갔다. 이러한 모순 구조 아래에서 어느 지역이나 할것 없이 계기만 주어지면 민란이 폭발할 구조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전라도는 삼남 중에서도 가장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질을 가진 조선의 곡창지대였다. 그리하여 중앙정부의 재정도 주로 전라도에 의존하고 있었을 뿐아니라, 궁방이나 관아에서도 조선왕조를 통해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가장 많은 둔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따라서 궁방이나 관아에서 파견한 도장(導掌)이나 감관(監官)에 의한 조세 수탈과 탐학은 어느 지방에서보다도 더 혹심하여 농민들은 이중삼중의 부담을 져야 했다. 

 

고부민란의 전개

고부민란은 전봉준 등의 지도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계획되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민란의 발생 자체는 조선후기의 일반 민란과 유사하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학정에 “온 고을의 인민이 참고 또 참다가 종말에는 더 참을 수 없어서 기뇨(起鬧)하였던”것이므로 애초에 그것은 고부농민만의 행동이었다. 황현의《오하기문》에서도 “백성들이 견딜 수 없어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수천 명이 모여서 진정호소하려 하였으나, 조병갑이 전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복영의《남유수록》에서는 “고부민들이 처음에는 소원하기 위해 관문 밖에 모였는데, 몇 명에 불과하였으나 점차 소문을 듣고 모인 자가 많아져 무리를 이루었으며, 전봉준이 거기에 뛰어들고 선동하여 민란으로 발전”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다만 고부민란이 여느 민란과 달랐던 점은 자연발생적 민란에 전봉준이라는 지도자가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개입한 점이다. 즉 고부민란은 조병갑에 대한 고부민의 원한이 자연발생적으로 민란 발발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게되고, 그에 따라 모여든 고부민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하자, 앞의 사발통문 거사계획에서 보는 바와 같이 때를 기다리던 전봉준이, 준비가 미흡하였지만 고부민의 자연발생적 동요를 이용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결심함으로써 발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부민란이 농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

고부민란과 제1차 농민운동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서는 고부민란이 소강상태로 들어간 이후 신임군수의 설득으로 민란 중민이 해산하는 동안 전봉준을 위시한 지도부가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를 추적해 보는 것이중요하다. 대개 군현 단위의 민란은 고립적으로 전개되다가 안핵사가 파견되어 민중을 기만적으로 설득하여 해산하면, 주모자를 색출하여 처벌함으로써 실패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전쟁 지도부는 바로 이러한 실패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성찰했을 것이다. 한 고을의 문제는 전국적인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군의 민란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묶는 조직세력이 없이 농민들의 단순한 집합만으로는 봉건정부가 기만책을 쓰는 경우에는 쉽게 해체되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전봉준은 군현 단위의 산발적인 민란을 묶어 낼 조직으로 동학조직에 주목했고 이러한 조직에 기초한 봉기만이 그 시대의 폐정을 개혁할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장기포

제1차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3월 20일(일설 3월 21일) 무장에서 창의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월 20일 각 고을에 농민전쟁을 촉구하는 격문을 띄운지 약 한달만에 각지에서 모인 농민군이 결집하여 농민전쟁의 봉화를 올린 것이다. 전봉준이 무장에 잠행하여 동학의 도소를 설치한 것은 동학농민전쟁의 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동학은 이미 충청도 보은에 최시형을 대접주로 하는 대도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동학의 조직체계로서는 각지의 포(包), 접(接)은 직접 이 대도소의 지휘를 받는 것이었지 따로 도소를 둘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호남의 동학을 공공연히 ‘남접(南接)’이라고 부름 으로써 대도소(北接)에 대해 조직의 독자성을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봉준이 독자적인 남접도소를 설치한 것은 동학 내부의 헤게모니 문제라기 보다는, 동학의 조직과 활동을 종교의 범주에 한정시키고 싶어 하는 북접(北接)의 제약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동학의 조직과 활동을 종교의 범주를 벗어난 전체 국가와 사회의 개혁운동에 적극 활용하고자 한 목적 때문이었다고 볼 수있다. 

 

무장기포 때의 농민군의 무기는 그동안 민란 때 관아의 군기고에서 빼앗은 무기와 민간의 무기로서 소총․화승총․창․칼․활․도끼․철퇴․죽창 등이었으나 잘 무장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밖에 말목장터에 집합하기로 약속된 농민을 무장시키기 위하여 말목장터 근방의 민가에 총창 수백개를 은닉해 놓았다. 무장기포 때의 군량은 이 지방 부민에게서 징수하고 봉납케 하여 충당하였다. 군량 뿐만 아니라 짚신과 군용전도 징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토현전투

황토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4월 6일 오후부터였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은 최소 4천여 명이었다. 감영군은 무남영의 정예 병력 3백여명을 포함하여 도합 2천여 명이었다.오후 4시경에 첫접전이 이루어졌다. 첫 접전은 일종의 탐색전이었는데 농민군은 짐짓 패한 척하며 황토현에서 후퇴하여 남쪽의 시루봉 자락으로 진을 돌렸다. 감영군이 이를 추격하여 황토현에 이르렀을 무렵 날이 저물고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곳에서 숙영을 했다. 감영군은 이 일대의 지리에 전혀 생소했고 때마침 비가 그친지 얼마되지 않아 안개마저 자욱했다. 농민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감영군은 소를 잡고 술까지 마셔가며 한가로운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농민군은 밤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새벽 4시경, 포를 쏘며 관군 진영을 혼란에 빠뜨린 농민군은 기습 공격에 성공하여 관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에서 관군은 천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지휘관인 영관 이경호도 전사했습니다. 이 승리로 농민군은 관군이 보유한 신식 무기인 대포와 소총을 대량으로 획득하며 전력을 크게 강화했고, 사기도 크게 올랐습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농민군은 '정부군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그동안 봉기를 관망하던 수많은 백성이 동학농민군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제1차 동학농민운동에서 농민군은 무엇을 목표로 싸웠는가?

농민군은 봉기의 시초부터 그들의 요구를 여러가지 형태로 제시해 왔다. 농민군은 창의문, 격문 등을 통해 봉기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고 전쟁의 상대였던 조선정부에 대하여는 자신들의 구체적인 요구를 담아 ‘원정(原情)’, ‘통문(通文)’ 등의 형태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정부측에 제시한 농민군의 요구사항들은 일종의 폐정개혁안 내지 사회개혁안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여기서는 폐정개혁안의 분석을 통해 농민전쟁 당시 농민들에게 부과되었던 사회적 모순의 성격과농민전쟁의 목표 내지 농민군의 사회경제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농민군이 제1차 농민전쟁 기간 중에 조목별로 제시한 폐정개혁 요구안 중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은 모두 여섯 가지이다.

 

4월 4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이 법성포 이향에게 보낸 ‘동학군퉁문(東學軍通文)’ 9개조,102) 4월 19일 경군을 이끌고내려온 초토사(招討使) 홍계훈에게 제시한 ‘호남유생원정문(湖南儒生原情)’ 8개조,103) 5월 초 전주화약 직전 화약의 조건으로 초토사 홍계훈에게 제시한 27개조 중 14개조,104) 전주성에서 물러나와 5월 11일경 순변사(巡邊使) 이원회에게 제시한 ‘전라도유생원정(全羅道儒生等原情)’ 14개조105)와 5월 17일경 추가문 24개조,106) 그리고 5월 20일 경 장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제시한 ‘개혁안’ 13개조107)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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