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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야기]

[와인이야기] 인류 역사와 와인에 얽힌 이야기, 음료 약이었던 와인, 와인 창문

by Sugarone 2025.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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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와인하면 프랑스를 먼저 떠올리지만 와인의 원조는 그리스, 이탈리아, 중동과 가까운 지중해 지역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증거는 중동지역에서 발견된 항아리다. 기원전 5500 년경의 것으로 당시에 이미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모두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포도재배는 기원전 5000년경 정착생활과 함께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우리는 삶의 다양한 것들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따로 사는 가족과 친한 친구와 연인과도 거리를 두었다. 회식자리는 사라지고, 집에서 일을 했다. 여행은 물론 잠깐의 외출도 신경 쓰였고, 마스크는 필수품이 됐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니 식당, 카페 등도 문을 닫거나 영업시간에 제한을 받았다. 

 

전염병에도 와인을 마신다. 와인창문

유럽에서 재밌는 술집이 부활했다. 400년 전 유럽에 페스트(흑사병)가 유행 했을 당시 처음 문을 열었던 이른바 와인 창문이다. 와인 창문은 페스트가 한창인 17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술집에서 식초로 소독한 금속 쟁반에 와인잔을 올려 창문 너머로 판매했다.

와인창문(출처 한국일보)
와인창문(출처 한국일보)

 

감염은 막으면서 와인을 즐기기 위해 고안됐다. 이후 와인 판매에 관한 법률이 변경되면서 사라졌지만, 코로나로 부활한 것이다. 토스카나주에 300여개가 아직 남아 있다. 2015년에 결성된 와인창문협회(Associazione Buchette del Vino)가 숨겨진 와인 창문을 발굴해 보존하는 사업을 펼치 기도 했다.

 

음료와 약으로써의 와인

고대 이집트인들은 맥주만큼 와인을 사랑했다. 포도를 넣은 커다란 자루를 밟아 으깬 뒤 비틀어 짠 즙을 지하창고에서 발효시켜 술을 만들었다. 파라오들이 사후세계를 준비할 때도 와인은 필수 였다. 투탕카멘 무덤 속 별도 저장고에 보관된 수십 개의 와인 항아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집트 와인항아리 발굴
이집트 와인항아리 발굴

 

발굴된 항아리 뚜껑에는 포도농원, 수확일, 즙을 짠 날, 색깔, 양조자 이름과 상표까지 있었다. 로마는 정복한 지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전략으로 포도나무를 심고 재배 및 포도주의 생산 기술을 전수했다. 그리고 중세에 이르러 기독교의 발전과 함께 와인은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됐다.

 

수도원에서는 1년 내내 빵과 포도주로 미사를 진 행했기 때문에 수도사들은 포도 재배에 정성을 다했다. 사실 초기 수도원에서는 와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325년 로마 가톨릭에서 성직자가 와인 마시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후 미사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기독교에서 와인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했기 때문에 성직자뿐 아니라, 일반 신도도 미사 때 함께 마셨다.

 

이로 인해 와인은 미사 때마다 필요했고, 수도원들은 포도 재배를 가장 중요한 생산 활동으로 여기게 되었다. 점차 수도원은 가장 중요한 양조장 역할을 하게 되었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은 와인 산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왕의 허가를 받아야 만들 수 있었던 포도밭은 혁명 이후 늘어났다.

 

부르주아 계급이 고급 와인을 대량 소비하면서 와인 산업은 새로운 발전기를 맞이했다. 1820년대 들어서 비로소 와인을 유리병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과 함께 와인 산업도 크게 변했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가 와인 산업에도 도입됐다.

 

군인 사기를 높인 전쟁 필수품

중세 시대에 와인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이 되었다. 중세 도시의 식수는 대부분 깨끗하지 않아 배탈이나 설사, 이질 등이 잦았다. 물을 소독하는 약으로 생각해서 포도주는 주로 물에 희석해서 마셨다. 이는 17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실제로 루이 14세는 40세 전까지 와인에 물을 타서 마셨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군인들에게 와인을 제공했다. 고대 로 마와 프랑스에서도 와인은 군인들의 필수품이었다. 맥주를 주로 마시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군대도 전쟁터에서는 와인을 받았다. 그렇기에 전쟁 때는 많은 와인을 확보해야 했다. 루이 14세 때 기록을 보면, 장교들에게는 하루 1.25ℓ, 일반 사병에게는 그 절반의 와인을 지급했다고 전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군인에게 와인을 지급했는데, 이 기간에 프랑스 군인들은 0.5ℓ의 와인을 무상으로 지급받았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의 승리가 와인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와인은 빠지지 않는다.

 

특히 와인에 대한 독일군의 욕심은 대단했 는데, 이는 독일군과 와인을 지키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영화 ‘산타 빅토리아의 비밀’을 보 면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고급 와인을 찾아내 독일로 보내는 임무를 맡은 부대까지 있을 정도였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 프랑스는 히틀러가 감춰둔 와인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최고급 와인을 50만 병이나 찾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와인은 전쟁에 관심 없지만, 전쟁은 와인에 관 심이 있다는 말까지 생겼다.

 

인류 역사에 얽힌 와인 이야기들

인류와 함께해온 와인은 다양한 문학 속에도 등장한다. 시작은 아마도 성경일 것이다. 예수는 결혼식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노아는 대홍수가 끝나자 포도나무를 심고 새로운 삶을 시작 했다. 스코틀랜드 왕인 알렉산더 3세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이 마신 와인의 총 양은 2만 5,500 갤런에 달한다. 지금의 와인병을 기준으로 정리하면 135,000병에 달한다.

 

또한, 1600년대 베니스의 조선소는 근로자들이 근무시간 동안 원하는 만큼 와인을 충분히 마시도록 레드와인이 샘솟 는 와인분수를 제작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포도를 재배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시대, 원(元) 나라 세조가 포도주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대일통신부사 김세렴의 「해사록(海笑錄)」에는 대마도에서 서구식 레드 와인을 대마도주와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1653년에는 일본에 가다 난파했던 네덜란드의 하멜이 가져왔던 적포도주를 지방관에게 상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포도 재배를 시작한 것은 뚝섬에 원예모범장이 설립된 1906년 이후부터다.

 

1918년 경북 포항의 미츠와 농장에서 만들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와인은 1969년 애플와인 파라다이스가 나오면서 시작됐다. 이후 1974년, 해태의 노블와인, 1977년 OB의 마주앙 등이 출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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