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밀맥주 호가든
호가든의 험난한 여정 아실 만한 분들은 이미 아시다시피, 벨기에는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온갖 다양하고 고급진 맥주의 천국과도 같은 곳입니다. 생긴 것도 가격도 와인인지 맥주인지 헷갈리는 에일 맥주, 그 이름도 신성한 트라피스트 맥주, 상한 듯한 시큼함이 나는 람빅 맥주까지 언급하고 나면 마치 그 곳은 수제 맥주를 만 병은 먹어본 자만이 입성할 수 있는 높은 성처럼 느껴지지만, 그 유명한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와 호가든(Hoegaarden) 역시 벨기에 맥주라는 것을 명심하셔야겠습니다.
홉이라는 식물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유럽에서는 맥주를 만들 때 그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허브와 향신료를 넣었습니다. 이를 그루잇(gruit)이라고 합니다. 벨기에 마을 후하르던(Hoegaarden)에서는 밀과 보리로 만든 맥주에 고수(코리엔더 coriander)와 오렌지 껍질 등을 넣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체코에서 출발한 필스너 열풍이 유럽을 휩쓸어 각 지방에서 만들던 고유한 맥주들을 멸종시킬 시절, 벨기에 마을의 밀맥주도 1957년 톰신(Tomsin)의 양조장을 끝으로 명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젊은 시절 이 양조장에서 일손을 도우곤 했던 피에르 셀리스(Pierre Celis)는 곧 이 밀맥주를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레시피를 정확하게 구현해내진 못했지만, 고수와 오렌지 껍질을 넣는 등의 핵심 정보를 기억해낸 셀리스의 맥주는 꺼진 줄 알았던 벨기에 밀맥주의 불씨를 살려냈습니다. 셀리스의 밀맥주는 큰 인기를 끌어 꽤나 번듯한 양조장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불씨를 너무 세게 살려버렸는지, 1985년 셀리스의 양조장은 화재로 무너졌고, 이를 복구할 돈이 없었던 셀리스는 스텔라 아르투아의 투자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댓가로 지분의 45%를 가져간 스텔라 아르투아는 3년 뒤 합병을 통해 인터브루(Interbrew)가 되었고, 상업적인 맥주 대기업의 노선을 걷기 시작합니다.
셀리스는 사람들이 점점 더 싼 원료를 사용하며 품질을 낮추기를 요구했고, 환갑을 넘긴 나이로 더이상 저항할 수 없다고 느껴 지분을 마저 팔고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당시의 인터브루는 지금은 AB InBev라는 이름의 더 거대한 회사가 되어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호가든을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셀리스에 의하면 원가를 낮추기 위해 품질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고수와 오렌지 껍질의 전통을 잇고 있는 벨기에식 밀맥주입니다. 한편, 미국 텍사스로 건너간 셀리스는 같은 맥주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도모했고, 심지어 미국 시장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다시 한 번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또다른 맥주 대기업 밀러(Miller)에 지분을 넘기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다가 2011년 돌아가셨습니다.
셀리스 브루어리라는 이름은 이처럼 어둡고 기나긴 역사를 떠돌다가 작년 6월, 피에르 셀리스의 딸 크리스틴 셀리스가 다시 운영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곳의 맥주가 아직 우리나라에 수입되고 있지는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국내에서 셀리스 화이트(Celis White)라는 이름의 맥주를 발견하신다면, 아마 그것은 피에르 셀리스가 차렸다가 대기업 밀러와 미시간 브루잉의 손을 거쳐 지금은 벨기에의 Van Steenberge 양조장에서 만드는 맥주일 것입니다.
피에르 셀리스에 의해 살아난 후하르던(Hoegaarden 호가든)식 밀맥주는 고수와 오렌지 껍질 등이 들어가 이국적인 향을 내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피에르 셀리스의 양조장을 이어받은 호가든이 대표적인 제품입니다. 하지만 셀리스의 성공 이후로 많은 양조장에서 이를 모방한 스타일의 밀맥주를 많이 만들었고, 현대 크래프트 맥주의 매우 진취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에 입각해 상상을 뛰어넘는 온갖 재료를 첨가한 밀맥주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갖 재료의 예로는 레몬 껍질, 생강, 레몬그라스, 육두구 정도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밀을 보리와 함께 사용한 맥주 중, 바닐라 혹은 정향의 맛을 내는 바이에른 지방의 효모를 쓰지 않고 대신 고수와 오렌지 껍질로 대표되는 향신료를 넣어 이국적인 향을 낸 것들을 대체로 벨기에식 밀맥주, 벨지안 윗(Belgian Wit)이라고 부릅니다. 독특하고 이국적인 향 때문에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스타일로서, 대표적인 예로는 호가든, 블루 문, 그리고 벨기에와 문화적으로 가까운 프랑스의 맥주 크로낭부르(Kronenbourg) 1664 블랑(Blanc)이 있습니다. 윗(Wit)과 블랑(Blanc)은 각각 벨기에어와 프랑스어로 흰색을 뜻합니다.
미국의 밀맥주
홉 홉을 다오! 저렴하고 싱거운 대기업 맥주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진한 맛의 크래프트 맥주를 즐기는 움직임이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움직임은 한편으로는 홉에 중독되어 더 자극적인 맥주를 찾는 방향으로 변질되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홉을 통해 새로운 맥주 맛을 창출하고자 하는 일부 미국의 크래프트 양조장에서는 밀맥주에 홉을 적잖이 넣은 '아메리칸 위트 에일(American Wheat Ale)'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밀맥주에 홉을 넣는게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독일식 밀맥주에도 홉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고, 특히 위에서 언급한 슈나이더(Schneider)의 5번 맥주는 일부러 홉을 많이 넣은 밀맥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밀맥주를 따로 정의하는 이유는 홉의 품종이 크게 다르고, 또 바이에른 지방의 효모를 사용하지 않아 맛도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유럽에서 많이 사용하는 홉은 흙이나 허브 향에 주로 비견되는 비교적 어두운 쓴맛을 내는 반면, 요즘의 미국 크래프트 양조장에서는 열대 과일이나 솔 향처럼 시트러스하고 상쾌한 비교적 가벼운 쓴맛을 내는 홉을 많이 씁니다. 크래프트 맥주에서 자몽을 비롯한 과일, 특히 열대 과일 향을 느끼셨다면 그것은 효모와 함께 홉이 만들어낸 맛일 것입니다. 정말 열대 과일 과즙을 넣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유럽과 미국의 맥주에 들어가는 홉이 항상 다른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독일에서는 쓰지 않았을 시트러스한 품종의 홉이 들어갔고, 바이에른 지방의 효모는 사용하지 않아 눅진한 바닐라와 정향의 맛은 나지 않는 밀맥주를 대체로 미국식 밀맥주, 아메리칸 위트 스타일로 분류합니다. 이 스타일의 맥주에는 때론 홉을 너무 많이 넣은 나머지 밀이 들어간건지 보리만 사용한건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밀과 보리라는 기본적인 재료의 깊은 맛과 밸런스보다는 화려한 겉치장의 비중이 높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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