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만든 음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술이라고 한다. 술은 탄수화 물이 미생물의 분해작용에 의해 알코올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성분을 함유한 음료(飮料)로 바뀌게 된 것으로, 이렇게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음료인 술을 우리 인간이 이용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이다.
술의 기원 및 전통주의 유래
술은 주정(酒精)이 되는 당질(糖質)의 종류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해지 나,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원리는 모두 같다. 그 예로서 포도나 사과 등과 같은 당질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원료에 자 연 상태의 미생물이 자연적으로 접종되어 생육하면서 대사작용을 하게 되 면 주정(酒精) 곧 알코올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발효산물(醱酵産物)을 우 리 인간이 과실주(果實酒)로 인식, 이용해 왔던 것이다. 또 쌀이나 기장과 같은 전분질의 곡물(穀物)에 빗물이 들어가고, 야생의 곰팡이를 비롯한 미생물이 자연적으로 접종되면 그 대사작용에 의해 전분 질은 당으로 바뀌고, 다시 야생의 효모(酵母)에 의해 화학적인 변화를 일 으키는 발효가 이루어지면서, 주정을 함유한 음료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곡주(穀酒)라 하여 애용해 왔던 것이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술은, 향기가 좋아서 우연한 일로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었고, 맛을 본 결과 맛이 좋고 기분이 야릇해지는 신 비한 힘과 쾌감을 경험하게 되면서,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피게 되었 을 것이고, 마침내 그 과정을 터득하게 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기호에 맞는 술을 빚을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주변 환경과 여건에 따라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의 술 을 빚어 즐겼을 것이란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인류의 술 에 대한 인식이고 역사이며, 술의 발달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술은 주정이 주성분으로 화학명으로 에틸알코올(ethylalcohol) 또는 에 탄올(ethanol)이라고 하고, 흔히는 알코올(alcohol)이라고 하는데, 우리나 라에서는 예로부터 술이라고 불러왔다. 그 유래가 언제부턴지,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나, 술의 유래와 어 원을 밝힌 내용을 보면, 동서양이 다 같이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착안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과실이든 곡물이든 술을 빚어두면 사람이 인위적으로 열을 가하지 않더라도 불에 의해 물이 끓는 것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마치 죽을 끓일 때와 같이 거품이 괴어 오르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열이 발생하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와 같은 화학적 발효현상은 인간의 눈에 경이롭고 신비한 현상으로 비쳤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이러한 경험은 난데없이 물에서 불이 난다 또는 불을 가둔 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연유로 물 불하다 가 물은 한자어로 수(水)라고 하는 까닭에 수불하다가 수블>수을>술 로 단음화 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에서는 술을 주(酒)라고 하는데, 물이 끓는 것과 같은 발효현상은 중국인들의 눈에 물이 익는다는 것으로 생각되었 을 것이고, 물( )이 익다(酉)는 뜻에서 주( )로 표기해 오다가 후일에 지금과 같은 주(酒)자를 쓰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초기의 술빚기에 이용되었던 그릇은, 장경호(長徑壺) 형태의 밑 이 뾰족한 독으로, 술이 익으면 맑은 술과 찌꺼기를 분리하여 마시게 되는 데, 그 형상이 술독에 용수를 박아 놓은 형태로 마치 한자어익을 유(酉) 자와 같다. 따라서 물이 익었으므로 찌꺼기를 제거하고 걸러서 마실 수가 있는 상태 인 술이 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술이나 중국의 주가 갖는 의미가 동일 한 것은, 술의 뿌리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권문화에서는 곡물에 곰팡이를 이용한 발효주(醱 酵酒) 곧 곡주를 발달시켜왔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한다. 나라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자신들이 속해있는 나라의 기후와 풍토에 순 응하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고유한 식문화를 발달시켜 왔 음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각 나라마다의 음주문화는 그 나라의 풍토성과 민족성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국적과 민족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문화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주의 시대별 변화, 전통주의 발달과정
우리나라 고대의 술빚기
동양에서의 술에 대한 기원은 중국 문헌『제민요술(齊民要術)』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누룩, 물, 곡물 등 세 가지 원료를 같은 비율로 섞고 술을 빚 는다하였고, 이것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빚으면 좋은 청주 곧 법주라고 하고, 식물 등 약재를 쓰는 특별한 청주와 산국(散麴)을 쓰는 청주들에 대해 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동시대의 우리나라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도『제민 요술』의 기록과도 같은 법주, 계명주 등의 술빚기가 이뤄지고 있었음을 살 펴 볼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289년의『제왕운기(帝王韻 紀)』로, 고구려의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의 건국담(建國譚)에 관한 이야기가『고삼국사(古三國史)』에 인용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들 문헌에서도 최초의 술 이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연 대, 술 빚는 방법을 찾아 볼 수는 없다. 다만, 천제자 해모수가 미리 술을 빚어놓고 하백의 세 딸을 유혹할 때, 세 처녀가 술대접을 받고 취하여 돌 아가려 하자, 해모수가 가로막았으나 세 처녀가 달아났다. 다행히 첫째 딸 유화가 해모수에게 붙잡혀 함께 잠자리에 들게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시 조가 되는 주몽을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술 얘기가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때에 이미 술이 애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술 이름이나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아 구체적 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이 밖에 삼한시대 및 고구려 사회에서 동맹(東盟)∙영고(迎鼓)∙무천(舞 天) 등 제천의식(祭天儀式)과 농경(農耕) 행사에 주야음주가무(晝夜飮酒 歌舞)하였고, 고구려 여인의 곡아주(曲阿酒)에 관한 기록이 중국 문헌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수록되어 있으며, 『고려도경(高麗圖經)』과『제민 요술』에도 우리나라 동이족(東夷族)의 술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 어, 우리나라 술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나라의 문헌으로는『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삼국유사(三國 遺事)』(1512년), 『지봉유설』(1613년), 『해동역사(海東繹史)』 (1765년)에서 신라주와 고려주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로써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매우 다채로운 술빚기가 이뤄졌고, 삼국 시대에는 탁주와 청주가 구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高句麗傳)」(290년대)에 건국 초기인 28년에 지주(旨酒)를 빚 어 한나라 요동태수를 물리쳤다고 하여 양조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 으며, 중국인들 사이에 고구려는 자희선장양(自喜嬋醬釀)하는 나라로 칭송 받았다고 하는 사실과 함께, 일본의 최고 역사서인『고사기(古事記)』(712 년)에 응신천왕 때 백제사람 인번(仁番)이 일본에 새로운 양조기술을 전 하여 주신(酒神)으로 모셔졌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의 새로운 양조기술이란 곡물을 원료로 하고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는 양조기술이 정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중국 문헌『주서(周書)』(627~649년)에 백제 후기의 양조기술이 중국과 대등할 정도로 안정된 틀을 갖추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때 에 누룩을 이용한 양조기술인 곡주발효법과 맥아를 이용한 감주발효법이 병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삼국시대보다 훨씬 다양한 주류들이 개발되어 상류사 회를 중심으로는 청주류의 음용이 성행하였고, 혼례 때의 납폐(納幣)음식 에 술과 단술(예주)이 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주가 보편화 되는 고려시대와 소주의 등장
고려시대에서는 새로운 기법의 전통주가 개발되고 보다 보편화되는 시 기라고 할 수 있는데, 술이 한층 다양해지고 질적으로도 향상되었음을 엿 볼 수 있다. 과거 쌀과 누룩, 물 중심의 술빚기에서 꽃이나 과실, 생약재를 이용한 가 향주(佳香酒)와 과실주(果實酒), 약용주(藥用酒)가 등장했고, 특히 중국으 로부터 증류기술이 도입되면서 소주(燒酒)를 이용한 혼성주(混成酒)와 혼 양주류(混釀酒類)가 빚어지는 등 전통주는 더욱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중국의 서긍(徐兢)이 우리나라에 와서 보고 겪은 풍습을 기록한『고려도경』에 려에서는 찹쌀의 산출량이 적었으므로 대체로 멥쌀술을 빚었는 데, 색이 진하고 독하여 쉽게 취하지만, 한편 쉽게 깨는 술이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여기서 색이 진한 술은 탁주(막걸리)를 가리키는 것이며, 독하며 쉽게 취하지만 빨리 깬다고 한 것은 탁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알코올 도수가 높 은 술로, 그 품질 또한 좋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실례로 동서『고려도경』「와존(瓦尊)」에, “왕궁에서는 좋은 술을 매일 마시는데, 좌고에는 청주와 법주 두 종류의 술이 질항아리에 저장되어 있 다. 항아리는 황견(색깔이 노랗고 별로 좋지 않은 꼬치에서 뽑은 실로 짠 비단)으로 봉해 둔다. 대체로 고려 사람은 술 마시기를 즐긴다. 그러나 좋 은 술을 빚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민가의 사람들이 집에서 마시는 술은 색은 짙으나 맛은 약하다. 스스로 좋을대로 마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궁중에는 청주와 법주의 두 종류를 항상 비축해 두고 마셨음을 알 수 있으며, 일반 국민은 막걸리를 주로 마셨는데, 그것은 요즈음의 농 주처럼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은 순한 술이었다. 여말과 조선(朝鮮) 초기의 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의 문집『목은집(牧隱集)』에 단오절 좋은 시절에 부의주에 창포꽃을 넣어 빚은 창포주를 즐기고, 9월 9일 중구일에 국화주 술잔에 달 그림이 가득하다고 읊은 시문이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도 요즈음 동동주라고 불리우는 부의주(浮蟻酒)가 있었고, 창포와 국화 등 제철의 꽃을 섞어 빚은 술로 가향주와 약용주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안축(安軸)(1282~1348)의 시문집인『근재집(槿齋 集)』에는화주에서 온 사람이 포도주를 가져왔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이 외에『고려가요(高麗歌謠)』, 『한림별곡(翰林別曲)』, 『근재집』등에 죽 엽주, 이화주, 국화주, 오가피주, 방문주, 삼해주, 부의주 등의 술 이름이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술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했는지를 엿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원(元)으로부터 도입된 증류주법은 획기적인 일로, 우리의 음 주문화와 양조법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증류주법, 즉 소주 제조법이 도입된 시기는 고려 중기 이후로, 아랍문화 의 하나였던 증류주법은 12세기경 서구라파로 전해지면서 브랜디의 시초 를 이루었으며, 동양(東洋)으로는 이슬람문화와 함께 원(元)에 전해져 소 주를 낳게 되었다.
원(元)은 한때 그 세력을 페르시아에까지 미쳐 이슬람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페르시아의 술 증류법이 몽고에 전해지게 되었고, 몽고는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고 려를 침입(1274년)한 후, 그들의 본당이었던 개성 과 병참기지였던 안동, 전초기지였던 제주도에 서 증류식 소주를 만들 어 마시게 되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그들 의 증류법을 익혀 몽고 군에게 보급하게 되면 서, 개성과 안동∙제주 도에서 전국으로 확산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증 류법이 중국을 거쳐 우 리나라에 와서 소주가 되었고, 12세기 십자군에 의해 유럽으로 가서는 포도주를 증류한 브랜디 를 낳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소주는 처음에는 몽고어 그대로 아라키라고 불려지다가, 아랑 주 아락주 화주 주로 등으로 불려졌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소주로 정착되었다.
전통주의 다양화 이룬 조선시대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옹기로 된 증류 전용의 소줏고리가 등장하면서 더욱 증류법이 발달하여 소주의 유행을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술은 대부분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것이 대부분 이다. 하지만 광작농(廣作農)의 확대로 농촌문화 변동의 계기를 가져와, 미곡의 증산과 지방의 유림문화(儒林文化)가 신장되었다. 이러한 환경변화는 향토음식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고, 결국 식생활문화 의 다양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가부장적 대가족생활은 더욱 공고해 졌으며, 통과의례(通過儀禮) 등 의례음식의 조리기술과 상차림이 고도로 발달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술 역시도 이런 환경에 영향을 받아 소위 전통주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산출량이 적었던 찹쌀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많이 생산됨 으로써, 조선 전기에는 멥쌀보다 찹쌀 위주의 양조원료 사용이 증가하고, 양조기법도 단양법(單釀法)에서 중양법(重釀法)으로의 전환이 뚜렷해지는 경향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양조기법 면에서는 점차 고급화 추세를 지향하는 한편, 상류 사회를 중심으로 중양주를 선호하게 되어 백로주(白露酒), 삼해주(三亥 酒), 이화주, 청감주(淸甘酒), 부의주(浮蟻酒), 향온주(香 酒), 하 향주(荷香酒), 춘주(春酒), 국화주(菊花酒), 백자주(栢子酒), 호도주(胡桃 酒) 등이 명주로서 주품을 자랑했다. 특히 고려 말엽에 정착된 증류주들은 조선시대에 들어 급속한 신장과 함 께 일본, 중국 등으로 수출이 빈번해지는 등 증류주문화가 국제화 단계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예로 삼해주와 같은 고급 양조주의 술덧까지 소주로 전용되는 기현상마 저 나타나, 서울의 공덕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삼해주 술도가에서는, 소주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삼해주를 모조리 소주의 술덧으로 전용했다고 한다. 이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소주의 유행으로 인한 양곡의 낭비를 한탄한 나머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줏고리를 거두어들 일 것을 조정에 청원(請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증류주에 대한 욕구와 수요가 어떠하였는지로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또 고려시대에 개발되었던 홍로(紅露)에 이어 황로(黃露), 갈로류(褐露類)의 주종까지 등장하는가 하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양조곡 주를 이용했던 자주류(煮酒類)가 소주를 바탕으로 각종 물료(物料)를 곁들 인 주품으로 새롭게 개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품으로 전라도의 죽력고(竹歷 )와 전라∙황해도의 이강고 등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후기의 또 한 가지 특징으로는, 지방색을 띤 다양한 고 급 양조주류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즉, 지방과 집안마다의 가전비법으로 빚어졌던 명주(銘酒)들이 속속 등 장하면서, 전통주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주품을 자랑하던 명주로는, 이른바 3차 중양법의 춘주(春酒)로 지 칭되었던 서울의 약산춘, 전라도 여산의 호산춘, 충주의 노산춘 등과 평양 의 벽향주, 김제와 충주의 청명주, 제주도의 초정주, 충남 한산의 소국주, 당진의 두견주, 그리고 계절주인 도화주, 송순주 등이 널리 알려졌는데, 이들 술은 주막(酒幕)에서도 팔리고 있었다 한다. 그 외에도 고려시대까지 양조곡주를 바탕으로 하였던 재제주류(再製酒類) 역시도 양조기법이 소주로 바뀌었다. 장미로, 매화로, 송화로, 감귤로, 이로, 박하로, 감국로, 자소로, 생강로, 목과로, 산사로, 인삼로 등이 그것이다.
이들 주류의 특징은 우리나라 전래의 풍미물료(風味物料)를 이용하고 있 다는 것 외에도, 외국의 재제주류를 무색케 할 정도의 맛과 향을 자랑하는 등 우리 선조들은 뛰어난 지혜와 술빚기 솜씨를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조선시대의 술과 관련하여 술 이름과 만드는 방법 등을 수록하고 있는『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齊)』를 비롯,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주방문(酒方文)』등 여러 문헌에 수록된 내용을 근거로, 조선시대의 술빚 기를 이전과 비교해 보면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찹쌀로 빚은 술이 증가하였다는 사실이다. 찹쌀술의 증가는 찹쌀 의 산출량이 그리 많지 않았던 조선시대로서는 술의 고급화가 진행되었다 는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둘째, 술빚는 과정에 있어 여러 번에 걸쳐 덧술을 한다는 사실이다. 즉, 중양주와 삼양주는 여러 번의 덧술과정을 거침으로써, 술의 고급화는 물론 이고 알코올 함량을 높이면서 많은 양의 술을 빚었다는 것이다. 셋째, 고려시대에 비해 소주의 선호도가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소주 를 기본으로 한 약용약주, 재제주, 혼양주가 많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1600년대의『규곤시의방(閨 是議方)』에 수록된 술의 종류는 모두 50종으로, 그 중에서 단양주가 19종인데 반하여 중양주는 24종이나 되며, 소주류 4종과 기타의 술이 4종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3월조」에“술집에서 과하주를 빚어 판다.
술 이름은 소국주, 두견주, 도화주, 국화주, 송순주 모두 봄에 빚는 술이다. 좋은 소주도 있다. 동덕 옹막에는 삼해주의 독이 천개씩 많다고 기록된 사실은, 다양한 종류의 술과 함께 향약재를 가미해 만든 약용약주, 그리고 송순주와 같은 혼양주가 일반화 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술은 지역에 따라 특징을 띠게 되었는데, 탁주∙약주∙증류 주의 제조와 이용분포가 지역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단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탁주류는 서울 이남의 남부지방에서 제조되어 농민과 하층계급의 음료∙영양원으로 주로 소비되어 농주라는 말이 생 겨 나기도 했다. 반면, 약주류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 중류층 이상의 계급에 서 제조∙이용되었으며, 증류주류는 서울 이북에서 주로 소비되었는데, 남부지방에서는 여름철에만 소주를 제조하여 이용해왔던 것이다.
전통주의 침몰과 밀주의 의미
1882년(고종 19년)에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독일∙영국∙러 시아∙일본 등과 국교가 성립되고, 이른바 국제화로 접어들면서 조선은 근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외교권을 빼앗긴 왕조와 함께 대한제국은 종말을 맞고 조선총독정치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일제의 수탈작업(收奪作業)이 시작되는데, 그 과정에서 제일 먼저 세금원의 공작대상이 되었던 것이 우리의 가양주(家釀酒)요, 지방마다의 토속주(土俗酒)였다.
1907년 7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세령 세칙(시행규칙)의 공포가 있었 고, 다시 9월에는 주세령을 근거로 한 강제 집행이 시작되었다. 주세령의 강제집행은 곧 전통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수 백 종에 달했던 전통주가 잠적하기 시작하였고, 각 지방과 집안마다의 가양주와 토속주는 밀조(密造) 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는데, 이어 일제는 1916년 1월 밀주제조에 대한 단속강화와 함께 모든 주류를 약주∙ 탁주∙소주로 획일화∙규격화 시켰다.
이로 인해 우리의 전통주는 단절과 함께 1917년 주류제조업의 정비가 시작되면서, 각 지방마다 대단위 주류제조를 업으로 하는 공장(釀造場)이 새로이 선정, 운영되었다. 또한 1920년에는 일본으로부터 소위 신기술에 의한 개량누룩제조(흑곡, 황곡의 배양균을 사용하는 입국법)가 활용되면서 전통의 단절과 함께,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저급의 술이 이 땅을 적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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